계절 기록
이른 봄의 검은 눈동자
겨울의 끝과 봄의 초입, 아네모네가 가장 짙은 빛을 짓는 짧은 한 주.
Edited by 백도윤 · 계절/비평 에디터

2월 마지막 주에서 3월 둘째 주까지, 아네모네는 가장 짙은 검은 눈동자를 짓는다. 한 해 중 그 짧은 한 주를 우리는 기다린다.
흰 꽃잎 한가운데, 검은 수술이 점처럼 모여 있다. 사진으로는 잘 옮겨지지 않는 깊이다. 카메라의 노출이 흰 꽃잎에 맞춰지면 가운데가 평면이 된다.
작업대 위에 한 줄기를 세워두면, 작업실 전체의 채도가 한 단 떨어진다. 봄이 시작되는 자리는 의외로 어둡다.
그 검은 점이 봄의 첫 신호다.

창가의 유리는 아직 차갑고, 오후의 빛은 늦게 도착한다. 그 낮은 빛 안에서 아네모네의 검은 중심은 겨울이 봄에게 넘겨주는 작은 그늘처럼 보인다. 봄은 언제나 밝아지는 사건이 아니라, 어둠의 농도가 조금씩 바뀌는 시간으로 먼저 온다.
검정은 색의 부재가 아니라 잠시 모든 계절을 붙잡는 밀도다. 흰 꽃잎과 검은 수술 사이에는 끝난 계절과 시작되는 계절이 서로를 바라보는 자리가 있다. 그 대비 때문에 아네모네는 가볍게 피어도 쉽게 흩어지지 않는다.
Atelier Note
계절의 색, 온도, 짧은 절정을 Maison Rachel의 시선으로 남깁니다.
